310℃ 느린여행 :: [00-01]서울생활 부적응기

2014.11.18 21:23

[00-01]서울생활 부적응기




<서울생활 부적응기>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불던 밤서울역에서 기차 아닌 버스를 기다린다평소보다 일찍 버스가 도착했고 텅 빈 버스에서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이어폰을 꼽고 아무런 취향 없이 주간 인기 100곡을 들으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그러던 중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다몇 년 만에 만난 친구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메고 있었다우리는 서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오래 전 친구들 소식을 주고 받으며 애써 반가워 했고 서로 공통점이 없는 대학 생활을 이야기 했다그리고 친구는 넥타이 매듭을 만지며 얼마 전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했다.

“빚도 능력이지!

친구는 대학병원 생활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마이너스 통장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몇 천 만원의 마이너스 통장은 조금 전 까지 몇 천 원에 고민하던 나를 마이너스 된 사람처럼 만들었다그리고 내 목은 넥타이를 멘 친구의 목처럼 답답해진다.

 

진작 넥타이를 멨어야 할 나이.

몇 천 만원의 빚을 자랑스럽게 가진 친구 대신에 잠시 반대편 검은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소매는 낡아 실밥이 흘러나왔고 낡은 고무줄로 묶은 머리는 너저분하게 헝클어 져있다마치 제 궤도를 찾지 못해 둥둥 떠다니는 우주 먼지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몇 번 정류장에 멈춰 섰고 친구가 일어났다오랜만에 만났지만 친구가 일어난 자리엔 반가움보다는 무거운 마음과 뒤쳐진 나만 남는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은 머리가 긴 남자라는 점 외에는 여행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학교에 복학해 세네 살 어린 동생들과 학교를 다녔고 설계실에서 밤새 과제를 했다그리고 종종 교수님들께 열등생 취급을 받으며 꾸역꾸역 졸업 전시 준비를 했다.

6월 말조금 이른 졸업 전시가 끝나고도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을 해야 할지취업을 할지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미처 끝내지 못했다그리고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고 무섭게 취업 시장이 열렸다일단 원서부터 넣자 라는 생각에 긴 머리를 짧게 잘랐다그리고 입사 원서에 단정하게 찍은 사진을 곱게 붙이듯 사진 첨부 버튼을 살며시 눌렀다.

그래도 다행이 어떤 ‘직장’을 가져야 하는지 명확히 선택은 하지 못했지만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싫어하는지 정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곳에만 입사 원서를 제출했다.

 

‘최종 제출 후에는 원서를 수정 할 수 없습니다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아니오.

 

수정할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아니오’를 몇 번이나 눌렀다가 간신히 ‘예’를 무겁게 누른다.

며칠 후부터 TV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몇 단계에 걸친 입사전형이 시작되었다여러 곳에서 서류만으로 탈락을 했고 몇몇 곳에서는 간신히 면접까지 보았지만 결국 탈락을 했다그렇게 계속되는 탈락 소식에 초조하고 실망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딱 한 곳에서그것도 가장 다니면 좋겠다 생각한 곳에서 최종 합격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렇게 넥타이 멘 사람이 되었다.








이제 왼쪽 가슴에 빨간 회사 뺏지를 달고 넥타이를 메고 지하철을 타며 출근을 한다생각보다 어른들의 아침은 일찍 시작 되고 있다다들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타이밍에 몸을 흔들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아가고 있다나도 역시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이 흔들리니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이 든다.

 

‘이제야 그럴 듯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구나.

 

어느새 지상을 다니던 전철이 지하로 내려 왔다창에 넥타이를 멘 내 모습이 비친다그리고 그 뒤로 이어폰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저렇게 항상 피곤하고 권태로워 보이는 분이 혹시 가이드북도 제대로 없던 시절유라시아 육로 횡단 여행 정도는 한 아저씨가 아닐까하고 상상을 해본다어쩌면 바로 옆에서 무표정한 표정으로 네이버 뉴스를 보고 있는 사람도 몇 년 전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아프리카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을 상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어느덧 전철은 꽤나 달렸고 넓게 한강이 펼쳐진다.

 

슈퍼 히어로들처럼 그들도 우리 사이에 이렇게 숨어 지내는 거야그러다가 때가 되면 굵은 뿔테를 벗고 집에서 제일 허름한 옷을 꺼내 몸짓 만한 배낭을 메고 인천 공항을 향하지그리고 방콕 카오산로드로 마치 지구를 지킬 것 마냥 다들 모이는 거야.

결국엔 ‘너무 더워.’라고 투덜대며 그늘 아래에서 낮잠만 자고 있겠지만.

어때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아?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까아니 다시 지난번 같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매달 꼬박꼬박 일정한 월급이 들어 온다그리고 언젠가는 풍족하진 않아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는 잔고가 생길 것이고 꼬깃꼬깃 숨겨둔 비상금 대신 비상용 신용카드를 어딘가에 숨겨둘 것이다








더 이상 그 도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참고 넘어갈 일도 없으며 쥐가 나오는 싸구려 숙소 대신 몇 천 원몇 만원을 더 주고 비교적 더 나은 숙소를 찾아 나서겠지.

그렇게 언제나 포기보단 카드를 떠올릴 것이다.

지난 번 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지갑은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즐거움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지나고 보니 참 반짝거렸던 시간이구나.

그래도 지난 여행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흔한 기억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출근시간,

당신 옆에 앉아

졸고 있을지 모를

 

어느 회사원의 지난 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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